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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버다이빙 사진

인간은 왜
탐험을 하는가?

탐험을 떠올리면 위험이란 단어가 꼬리표처럼 붙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위험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다. 지금껏 소수의 사람만이 위험을 감수하고 탐험에 나섰다.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안전을 보장해 줄 도구나 시스템도 없었다. 오로지 체력과 동료들에게 의지해 위험을 감내했다. 그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미지의 세상을 발견했고 자연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탐험기는 발견보다 위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탐험이 반드시 위험을 동반해야 하는 일이라면 탐험도, 탐험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탐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던 최초의 인류는 더 나은 서식지를 찾아 탐험에 나섰다.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실려 외롭게 우주로 날아간 허블우주망원경은 인류에게 새로운 우주를 보여주었다. 이렇듯 시대에 따라 탐험의 가치가 바뀌고 있다. 단순히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모험을 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화적 가치로 변하고 있다.

이처럼 탐험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탐험가들의 호기심과 그들의 노력과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지리와 기후의 복잡성을 파악하고 다양한 야생 동식물을 인식하며, 오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 관습 그리고 신념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탐험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이롭고, 한편으로는 해로운 결단과 영웅주의, 생존과 만남의 매력적인 이야기다. 이 역사 속에는 가장 어두운 바다 깊은 곳, 태양계 행성의 색다른 광경, 그리고 이보다 더 먼 우주에 이르는 비범한 사람들이 가득하며, 무수한 사람들이 이들의 인상적인 업적과 모험 정신을 본받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 인류의 관점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탐험의 순간이 있다.

[글 문경수 과학탐험가, 플레이랩스 대표]

자크 이브 쿠스토, 인류에게 심해를 보여주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경쟁하듯 달 탐험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프랑스인들은 개척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프랑스인이라면 1950년대부터 80년대 말까지 자크 이브 쿠스토가 전하는 바닷속 나라의 신비로운 영상을 보며 달콤한 주말을 보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대통령 이름은 잊어버릴지언정 쿠스토의 이름은 잊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그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스쿠버다이빙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의 존재는 국경을 넘어 달세계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까지 흥분시켰다. 화성탐사선을 제작하는 나사 과학자들은 새로 만든 우주선을 그에게 보여주고 품평을 받는 걸 영광으로 여겼다. 세계 2차대전 당시 해군장교로 근무하던 쿠스토는 전역을 하고 해양 탐사선 칼립소 호를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해양 탐험에 돌입한다. 해양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새로운 잠수 장비와 기술을 실험하고, 난파선을 찾아내서 유물을 인양하고, 정부 및 대기업의 요청을 받아 해양 자원 탐사를 실시했다.

스쿠버다이빙 사진

하지만 그의 탐험이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해마다 프랑스 국민을 대상으로 해양탐험대원을 모집했다. 탐험대원으로 선발되면 칼립소 호를 타고 전 세계 바다를 탐험했다. 탐험에서 얻은 지식을 프랑스를 비롯해 전 유럽 사회에 공유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바닷속 심해 세계는 베일에 싸인 미지의 공간이었다. 달에 다녀온 사람보다 심해에 다녀온 사람이 적다는 말이 있을 만큼 접근이 어려운 세상이었다. 그는 수차례에 걸친 심해 탐사를 통해 1956년 <침묵의 세계>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제9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 쾌거를 이룩한다.

1980년대에는 70대에 접어든 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였다. 바다 그리고 환경에 대한 지식수준을 올려준 사람이야 말로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는 프랑스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9년에는 30여 년간 근무한 모나코의 해양 박물관 관장 직에서 물러났지만, 과학자가 아닌 탐험가 최초로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한 해양탐험가의 호기심과 새로운 발견에 대한 열정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다.

우주와 심해의 매력에 빠진 소년 제임스 카메론

쿠스토의 탐험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바다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의 내륙지방에 살던 한 소년의 인생관을 바꿔놨다. 그 소년은 쿠스토의 해저 다큐멘터리에 온통 마음을 뺏긴 영화감독 제임스 카메론이다. 심해의 이색적인 풍경도 멋있었지만 열여섯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쿠스토가 보여준 호기심과 탐험정신이었다. 제임스 카메론은 그때부터 우주와 심해를 대등한 것으로 보는 안목을 키웠다. 쿠스토의 탐험에서 영감을 얻은 카메론은 부모님을 졸라 버펄로에 있는 풀장에서 스쿠버다이빙 강습을 받았다. 그 뒤로 최근까지 수천 시간을 바다 속에서 보내며 심해탐사에 집중한다.

그는 영화 타이타닉으로 영화 흥행사를 다시 쓰고 난 뒤 돌연 행방이 묘연했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니 러시아 미르 잠수정을 대여해 나사 우주생물학자들을 잠수정에 태우고 태평양 심해 탐사를 하고 있었다. 이 탐사의 기록은 쿠스토가 했던 것처럼 <에이리언 오브 더 딥>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됐다. 심해의 열수구 근처에는 햇빛 없이 생존하는 독특한 생물들이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열수구 탐사는 그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고, 결국 그는 자신만의 SF 이야기를 완성하게 됐다. 그때 그가 심해에서 기이하게 빛을 내는 동식물을 아바타에 등장하는 생물들을 디자인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심해 사진

그 뒤로 2009년 카메론 감독은 영화 아바타를 만들면서 공학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세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로 잠수할 1인용 잠수정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작업이었다. 수심 1만 1000미터의 마리아나 해구에 마지막으로 도달한 유인잠수정은 미 해군 잠수정이었다. 하지만 해구에 도착하자마자 잠수정 유리창에 금이 갔고 겨우 20분간 대양저에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그는 좀 더 빠르게 잠수하고 오랜 시간 대양저에 머물며 연구를 수행할 잠수정이 필요했다. 그의 창의적인 생각은 백년 넘게 배 모양으로 만들어진 잠수정을 연필 모양의 수직형태로 바꿨고 수 십 가지의 과학실험 장비를 장착한 잠수함 딥씨 챌린지 호를 완성했고 2012년 본인이 직접 조정해 마리아나 해구 탐사에 성공했다.

훗날 그의 잠수함은 쿠스토가 그랬듯이 NASA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심해로 들어가는 여정이 우주로 날아가는 경험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NASA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우주탐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급기야 2012년 발사된 화성탐사선 큐리오시티 호의 눈에 해당하는 마스터 카메라를 개발해 나사에 기증을 했다. 그는 화성탐사선이 촬영한 실제 화성의 영상을 갖고 완벽한 우주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호기심은 우리 모두 선천적으로 가진 것이다. 호기심이 없다면 우리는 오늘날처럼 기술적으로 진보한 종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며 상상력이 밑바탕 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어디선가 굉장한 무엇인가가 알려지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굉장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을 갖고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는 자만이 굉장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