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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심리학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 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등을 썼다.

[글 박한선 (신경인류학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친구와의 즐거운 점심 약속을 한 여자. 하지만 아주 불편하다. 친구가 무려 3분이나 늦었기 때문이다. '남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의 인생을 빼앗는 것'이라는 경구도 있는데. 애써 표정을 관리한 여자는 식당으로 향한다. 그때 친구가 말한다. "아, 지갑을 두고 왔네. 미안한데 만 원만 꿔줄래?" 여자는 더는 참을 수 없다. '친구 사이의 돈거래는 우정을 깨는 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친구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안 되는 일이다. 그냥 오늘은 헤어지자고 한다.

양심적인 인간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국어사전에 제시된 양심의 정의이다. 양심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을 것이다. 옳은 일,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니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할 일이다. 3분과 만 원. 기다려줄 수도 있고 빌려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늦게 와서 돈을 꿔달라고 한 친구가 잘못이다. 여자는 옳은 일을 했다. 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믿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옳은 행동이 모인다고 옳은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과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흔히 비양심적인 행동을 저지르곤 한다. 타인에게 엄격한 도덕 원칙과 업무 성과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융통성도 없고, 관용도 없다. '옳지 않은 일'에 관용을 베푸는 것 자체가 '악'과 타협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주변 사람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떠나간다. 이들이 가진 내적 기준은 아주 완고하고 강력하다. 세상만사에 불편해하고 본인이 세운 기준에 따라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깡통을 넣는 분리수거통에 플라스틱 통을 집어넣었다고 '지구의 파괴자'라도 된 듯 몰아세우거나, 노약자석에 노약자가 아닌 자가 앉으면 마치 가슴이 막히는 것 같은 엄청난 불쾌감을 느낀다. 이들에게 맞춤법은 말 그대로 '법'이다. 맞춤법을 어기면 범법 행위다. 친구와 돈거래는 고사하고 커피 한 잔도 서로 나누어 마시지 못한다. 사람보다 양심이 먼저다.

집착적인 자기검열

이들의 삶은 강박적 질서로 가득하다.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 모든 계획은 시간에 따라 나뉘고, 각각의 목록과 순서, 규칙이 제정된다. 머릿속에 담을 수 없는 수준으로 계획이 방대해지면, 종이에 적기 시작한다. 종이가 너무 많아지면, 종이를 분류하는 규칙을 만들고, 각각에 라벨을 붙여 보관한다. 종이를 분류하는 규칙을 적은 종이가 많아지면, 그에 대한 메타 규칙(규칙 간에 충돌 해결 전략이 담긴 규칙, 도는 규칙을 필터링하기 위한 규칙)을 제정한다. 고층 건물을 설계하는 중이라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집착과 강박을 삶의 전 영역에 투사한다. 식사 준비나 청소, 집안 정리 같은 소소한 일도 아주 복잡한 규칙과 순서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심지어 아무렇게나 편안하게 앉아있으려는 거실 소파도 '아무렇게나' 이용해서는 안된다. '아무렇게나' 앉는 것도 일종의 규칙이 있는데, 만약 정해진 대로 '아무렇게나' 앉지 않고 정말로(!) '아무렇게나' 앉으면 마음이 아주 불편해진다. 도무지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밀경찰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삶의 자유가 말살되고, 자율적인 행동은 금지된다. 같이 사는 사람도 고통스럽지만 정작 가장 힘든 사람은 본인이다. 자기 멋대로 만든 법과 규정에 스스로 얽매여서 단 한 번의 인생을 스스로 억압하고 자학하면서 살아간다.

강박적인 이기심, 강박적인 분노

강박과 집착이 심해도 뭐라고 할 것은 없지 않을까? 본인과 주변 사람은 좀 괴롭겠지만 세상은 원칙대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그러나 강박적인 사람, 양심을 내세우는 사람이 내적으로 따르는 기준은 겉으로 보이는 대의명분이 아니다. 이들은 늘 내적 갈등에 시달리지만 결국 결론은 자신의 이익이다. 지각하면 인생을 빼앗는 것이고, 친구 사이의 돈거래는 나쁜 일이라고? 그런 원칙은 따르면서 왜 '사랑은 기다려주는 것'이고 '우정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라는 원칙은 왜 따르지 않는 걸까? 이들이 추구하는 강박적 규칙은 통제하고 싶은 내적 소망을 위장하고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하나하나의 사리 분별은 옳은 일 같아 보이지만 너무 과하고 집요하다. 내적인 인색함을 위장하고 타인에 대한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매사에 소소한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며 심판자의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환경에 맞게 유연하게 바꾸는 스타일이 아니라, 일관되게 경직된 태도를 유지한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철저하게 복종하고, 낮은 사람에게는 과도한 순종을 요구한다. 이른바 바람직한 질서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환경에 따른 유연한 타협이 더욱 유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위 '올바른' 방법만을 고집한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한 말이다.

건강한 강박, 건강한 집착도 있을까?

그렇다면 집착과 강박은 그저 고집 세고 이기적인 태도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강박과 집착은 인류 문명을 만든 원동력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절차와 규칙, 의례, 전통이 있다. 이를 꿋꿋하게 지키는 이들도 있다. 원시 사회에서 강박성이 높았던 사람들은 집단의 전통과 관습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양한 규칙과 규율을 배우고, 지키고, 전수했을 것이다. 과거부터 내려오던 것이라면 열심히 모으고 지키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문자 언어가 생긴 이후, 이들은 또 다른 엄청난일을 시작했다. 강박적으로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그들의 기록은 역사가 되고, 그들의 의례는 문화가 되었고, 그들의 생각은 정신이 되었다. 강박성 성격을 가진 사람 중 상당수는 '강박'을 벗어나야 한다는, 역설적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강박과 집착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안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며 주변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제거하고,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삶을 생산적으로 살찌우는 건강한 강박, 건강한 집착이 남을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문명의 원동력 말이다.

진짜 집착을 보여주는 영화 셋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장르 코미디
  • 감독 제임스 L. 브룩스
  • 출연 잭 니콜슨, 헬렌 헌트

강박증 영화계의 레전드.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의 로맨스 소설 작가인 주인공 멜빈 유달. 그는 강박증을 갖고 있다. 길을 걸을 때는 보도블록의 라인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고, 사람들과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또 식탁에 가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이런 엄청난 강박증을 가진 그가 마음을 열고 사랑과 우정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

강박이 똑똑!

  • 장르 코미디
  • 감독 빈센트 빌라누에바
  • 출연 로시드 팔마, 파코 레온 등

여러 유형의 강박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계산강박, 저장 강박, 위생 강박, 반복 강박, 선 면 강박, 뚜렛 강박 등 다양한 강박증을 가진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던 강박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주말을 즐겁게 해줄 유쾌한 코미디 영화를 찾는다면 괜찮은 선택이다.

향수

  • 장르 스릴러
  • 감독 톰 티크베어
  • 출연 벤 위쇼, 더스틴 호프만

광기 어린 집착의 진수를 보여준다. 배경은 18세기 프랑스, 불행한 주인공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오로지 향기뿐이다. 천재적인 후각을 가진 그는 향수제조사의 후계자로 들어가고, 파리를 열광시킬 최고의 향수를 탄생시키지만, 향기에 집착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상하고 기묘하게 뒤틀려있다. 그의 집착이 가져온 충격적인 결말 또한 관전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