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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봉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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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계주

아빠와 함께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날 계획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랑 둘이서만 간다고? 그것도 인도에?" 나는 "친구 같은 아버지라 괜찮아요"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TMT(Too Much Talker)가 될까 봐 두려워 못다 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글 경제경영연구소 도현우 연구원]



평생 직장인이었던 아빠의 위대함

어릴 적 나는 유난히 아빠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매일 밤 퇴근하시는 아빠를 기다리다 멀찍이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가 폴짝 품에 안기거나, 주말이면 집 근처 학교운동장에서 아빠와 공을 차고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우리가 살던 부산에서 300㎞나 떨어진 군산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당시 10살이었던 나는 아빠 얼굴을 매일 볼 수 없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 이후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은 일주일 중 나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고, 시간이 흐른 후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단란한 가족 뒤에는 아빠의 희생이 있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한 직장에서 근무하셨다. 돌이켜보면 여름휴가 외엔 딱히 쉬는 날도 없으셨던 것 같다. 군산으로 발령받으신 이후에는 거의 매주 부산에 오셨으니, 주말도 가족을 위해 보내셨다. 그 당시는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랐지만, 주말이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직장인의 삶을 살아 보니 새삼 아빠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아빠의 버킷리스트

"친구 같은 아버지라 괜찮아요"라는 짧은 대답 뒤에는 소중했던 주말에 대한 기억과 아빠의 희생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 아빠가 나를 위해 노력한 만큼 나도 아빠를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아빠가 하셨던 것처럼 시간으로 보상해 드리고 싶었다. 물론 아빠와 함께한다는 즐거움이 가장 컸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캠핑을 가거나 서핑강습을 받으러 가는 등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이유 중에는 아빠의 희생에 대한 마음속 빚이 있었던 것 같다. 2018년 연말이 다가오고 입사 후 첫 휴가계획을 짤 무렵 아빠의 여행 버킷리스트가 떠올랐다. 거기엔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 인도 배낭여행 가기' 등 다양한 여행지가 있었다. 아빠와 함께하는 여행이니, 그 어떤 곳이라도 좋겠지만 인도 배낭여 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나는 인도를 선택했다. 그리고 거기엔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함께했다. 그렇게 아빠와 나는 둘이서 배낭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9박 11일이라는 빠듯한 일정 때문에 '델리-자이푸르-아그라-카주 라호-바라나시-델리'로 이어지는 북인도 일주코스를 선택했다. 이코스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인 타지마할, 생명과 죽음의 강 갠지스에서 바라나시를 모두 볼 수 있는 루트이기 때문에 직장인들이 휴가 5일(월-금)을 내고 떠날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이면서 인기 있는 일정이다. 지금부터 아빠와 함께한 인도여행에서 느꼈던 것들을 적어보려 한다.

느릿느릿 기차여행으로 얻은 소중한 시간

인도는 한반도 면적의 약 15배다. 그래서 도시 간 이동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가장 보편적인 교통수단은 기차다. 한 번 타면 보통 7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이 넘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느릿느릿 가는 완행열차와 열악한 인터넷 환경이 묘한 힐링을 가져다주었다. 한국에서는 한 장도 쉽게 넘기기 힘들었던 인도 역사서를 읽고,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4인치 남짓 화면에 빼앗겼던 시선을 되찾자 주변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아빠와 두런두런 이야기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생겼다. 누군가에겐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교통수단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인도의 열차는 여행 그 자체였다. 평소 살가운 아들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우리 부자(父子)는 썩 대화가 많은 편이 아니다. 더욱이 스무 살부터 집에서 나와 살다 보니 오랜만에 종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다소 어색했다. 그 순간 인도 역사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아빠를 생각하며 인도 역사서를 한 권 사 갔던 것이 주효했다. 함께 역사서를 읽으면서 인도 사회,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빠 어릴 때 이야기, 한국 정치·사회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빠와 나는 할 말이 없었던 게 아니고 대화를 시작할 매개체가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그 매개체를 하나씩 늘려가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강, 갠지스

인도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바라나시를 선택할 것이다. 삶과 죽음을 동시에 그리고 직접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인들의 삶은 갠지스강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하여 죽은 뒤 화장되어 갠지스강에 뿌려지면서 끝이 난다. 특히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는 화장터의 불꽃을 보고 있노라면 생각이 많아진다. '지금 옆에 있는 아빠와도 언젠가 이별할 때가 오겠지. 아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죽음을 바라보며 시작된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에서 끝이 났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러니까 더 잘해야겠다.' 생각은 많았지만 아빠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라나시를 끝으로 우리 둘의 여행은 끝이 났다. 돌이켜보면 9박 11일의 여행 속에는 20년 전의 아빠와 나의 모습부터 현재 그리고 먼미래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문구 중에 "Life is a journey"라는 말이 있다. 아빠와 나의 인도여행은 끝이 났지만 앞으로 함께할 삶의 여정은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 여정도 끝이 나겠지만 끝나는 그 날까지 지금처럼 친근한 부자(父子)였으면 좋겠다.

다음 필봉계주 주자는 성과평가부 권승연 직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