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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심리학


무심코 지나가다 한 동료 직원의 컴퓨터 배경 화면에 시선이 꽂혔다. 하얀 설산을 배경으로 동틀 무렵을 촬영한 사진이다. 갓 동이 튼 직후의 붉은색과 아직 어두운 청색 하늘이 흰 설산에 물들어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빚어냈다. 한마디 안 할 수 없지. "배경 화면 멋지네요. 이런 건 어디서 구해요?" 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 이거 제가 찍은 건데, 괜찮나요?" 사진작가라고 해도 좋을 대단한 실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더욱 놀라운 답변이 뒤를 이었다. 그저 취미로 찍는 사진이란다. 어차피 사진은 장비 빨이라며, 누구나 좋은 카메라로 찍으면 이 정도는 찍을 수 있다는 겸손함도 잊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사내 농구 동호회 회원들 사이에서 장비에 대한 정보 공유는 언제나 핫이슈였으며, 부장님도 취미생활인 골프 얘기만 나오면 골프채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꺼내신다. '덕질'은 정말 장비 빨인 것 같기도 하다.
[글 유지현 (진화인류학자]



유지현 (진화인류학자 )
유지현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공인회계사(AICPA)를 취득했다. 포스코 인사부와 현대건설 재정부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학교 인류학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과정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생물인류학 연구실에서 마음과 행동의 진화에 관해 연구 중이다. <비협력자에 대한 처벌과 평판: 처벌의 비싼 신호 보내기 효과>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인간의 집단 협력과 처벌의 공진화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인류의 조상은 덕후?

아주 먼 인류의 조상들도 도구와 장비에 꽤나 많은 열정을 기울인 것 같다. 사실 인류 진화의 역사는 도구의 발전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사용된 도구의 종류를 기준으로 고인류 종을 분류할 수 있을 정도다. '손 쓴 사람(Handyman)'으로도 불리는 호모 하빌리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현생인류에 더 가까운 호모 속으로 이행하는 첫 번째 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도구를 만든 최초의 호미닌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약 200만 년 전 이들이 만든 올도완 석기는 의도적으로 돌을 깨서 날카로운 부분을 만들었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돌멩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호모 하빌리스보다 한 단계 더 현생 인류에 가까운 호모 에렉투스에 이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이들은 도구의 실용적인 면보다 도구 제작 자체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듯하다. 도구에 덕질을 시작했다고나 할까? 이들이 만든 석기는 프랑스의 성 아슐 지방에서 많이 발견되어 '아슐리안 손도끼'라고 한다. 규암, 흑요석 등의 돌을 앞뒤, 좌우 대칭 형태로 한쪽은 뾰족하게 날을 세우 고 반대쪽은 둥글게 만들어 물방울 모양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또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 마치 고대의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을 보는 듯하다. 완벽하게 앞뒤, 좌우 대칭을 이루는 심미적인 손도끼가 사냥이나 실생활에서 특별히 더 나을 것이 없었을 텐데도 인류의 조상들은 엄청난 열정과 노력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기를 만드는 데 열을 올렸던 것 같다. 심지어 상당수의 아슐리안 석기는 전혀 사용한 흔적이 없다. 먹고 사는 문제와 상관없이 심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에 열정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또 그 옛날에 누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기에 가장 오래된 덕질의 흔적으로 볼 수 있겠다. 그 이후로 석기 제작기술은 점점 더 정교하고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다.

덕질은 통한다

1977년,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그렉 보웬 상병이 경기도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을 산책하다 발견한 이상한 돌들은 그동안 아시아에서는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여겨왔던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덕후는 덕후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강변을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 눈에는 특별할 것 없었던 평범한 돌.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고고학 덕후' 보웬은 돌멩이의 다듬은 흔적만 보고도 유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주변을 더 뒤져서 이상한 돌 서너 개를 더 찾아 당시 국내 고고학자였던 서울대 김원룡 교수에게 보냈고, 몇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놀랍게도 전곡리의 돌들은 그동안 아시아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아슐리안 손도끼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이후 연천 전곡리 유적 발굴을 통해 석기 6,000여 점을 추가로 발견했고, 연천 전곡리는 세계적인 전기 구석기 문화 유적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 고고학 덕후 현대인 덕분에 고인류의 덕질 흔적이 발견된 것이니, 인류의 덕질에 새삼 경외감이 들 정도다.

덕질과 몰입

사실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르던 '오덕후'의 줄임말이다. 초기에는 '집안에 틀어박혀서 취미생활에만 몰두하는, 사회성 부족한 사람'이란 부정적인 단어로 쓰였으나 요즘에는 점점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특히 파생어인 '덕질'은 어떤 분야에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몰두하는 행동, '성덕'은 성공한 덕후의 줄임말로 덕질 분야의 전문가가 되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해 덕질하는 대상을 직접 만나게 되는 사람을 의미하는 등 더욱 긍정적인 단어로 환골탈태 중이다. 최근 들어 단순하게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 스스로 공부하고 즐기는 문화가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분위기다. 게다가 어떤 분야에 열정과 흥미를 가지면 자연스럽게 몰입하기가 쉬워지는데 이에 따른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들이 있다.

몰입과 행복감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몰입은 그 자체로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조건'이라 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과 놀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해보니, 어떤 일을 일로 하던 놀이로 하던 간에 집중력, 즉 몰입해서 한 경우에 자기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인생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삶의 순간순간 '몰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은 자아의 방어가 필요한 외적 위협 없이, 우리의 주의가 목표만을 위해서 자유롭게 사용되는 '최적 경험의 상태'로 정의한다. 어떤 사람은 달리기를 하면서, 또 어떤 사람은 사진을 찍으면서, 또 다른 사람은 독서를 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이러한 몰입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몰입은 어떻게 행복감과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몰입에 의한 행복의 경우 외부적인 상황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통제 하에 얻어지는 행복이기에 더 값지고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몰입과 창조성

덕후가 덕질을 통해 해당 분야에 전문가 이상의 능력을 갖추면 '능덕'이 되고, 해당 분야에서 직업까지 얻게 된다면 '덕업일치', 그렇게 꿈을 이룬다면 성공한 덕후, 즉 '성덕'이 된다고 한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과 창조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연구했는데, 창조적인 사람의 3가지 요건으로 전문지식과 창의적 사고, 그리고 몰입을 제시했다. 지식이 기반이 되었을 때 창조도 가능하며, 사물을 다르게 보는 창의적 사고가 필요하고 나아가 그 과정에 몰입해야 창조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성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몰입이 창조성에 필수적이라니, 앞으로 덕후들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시점이다. 자, 아직도 '덕후'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주변을 둘러보라. 막걸리를 좋아하는 막걸리 덕후, 야구를 좋아하는 야구 덕후, 과학을 좋아하는 과학 덕후 등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아 열성적으로 즐기는 멋진 덕후들이 늘고 있다. 취미가 됐든 직업이 됐든 좋아하는 일에 한 번쯤 푹 빠져서 제대로 즐겨보자. 행복해지고 싶은 그대여, 입덕(덕질을 시작함)을 권하는 바이다.

덕후의, 덕후에 의한, 덕후를 위한 영화 셋

레디 플레이어 원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가 지배하는 2045년의 미래. 현실은 암울하지만 '오아시스'에서는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해 플레이어에게 말 그대로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어느 날 오아시스 창시자는 3개의 미션에서 우승하는 사람에게 오아시스 소유권과 막대한 유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가 사랑했던 80년대 대중문화 속에 힌트가 있음을 알린다.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198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이 인상적이다.

스탠바이, 웬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소녀 웬디는 시간대별로 할 일을 정해놓고, 요일별로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그녀의 일상이 이렇게 빡빡한 이유는 '스타트렉 덕후'의 꿈인 스타트렉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을 위한 것. 공모전을 위해 우편을 발송해야 하지만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횡단보도도 건너본 적 없는 웬디는 결국 꿈을 향해 캘리포니아에서 LA 파라마운트 스튜디오까지의 기나긴 여행을 감행한다.

베이비 드라이버

은행 강도단의 탈출 전문 운전사인 베이비는 어릴 적 사고로 청력에 문제가 생겨 늘 이어폰을 꽂고 다닌다. 그에게 음악은 이명을 없애는 수단이자 단조로운 일상에 리듬을 입히는 도구다. 어느 날 그에게 사랑 노래와도 같은 데보라가 찾아오고 베이비는 새로운 삶을 위해 강도단 탈출을 꿈꾼다. 과연 그의 탈출은 성공할까? 속도감 있는 질주 씬과 영상에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음악은 재즈애호가와 자동차마니아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