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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봉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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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계주

이번 설 연휴에 휴가를 조금 보태, 한국 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네팔 '소망의집'에 방문했다. 소망의집은 네팔에서 가장 큰 보육원이다. 카트만두에서 차를 타고 잠시도 직진하지 않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7시간 정도 가면 치투완이라는 시골 동네가 나온다. 소망의집은 그 치투완에 있다.

[글 인천기지본부계전보전부 서하은 직원]



다양한 사연이 모인 집

아무것도 없는 치투완 벌판에 20년 전 선교사님 부부가 오셔서 직접 벽돌을 날라 집을 지으셨다. 지금은 학교, 유치원, 남·여 기숙사, 교회, 닭장,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돌담에는 코뿔소와 멧돼지의 흔적이 있다. 매일 밤 자려고 누우면 코끼리와 여우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박쥐가 몇 번 주방에 들어왔고, 산책하러 나갔던 마을 어귀 강가에선 악어도 보았다. 난방이 없어 롱패딩을 껴입고 핫팩을 몇 개씩 껴안고 잤다. 온수도 없었다. 차가운 지하수를 퍼 사용하는데, 낮엔 반소매를 입을 정도로 일교차가 커 그때 씻을 수 있었다. 그래도 선교사님부부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망의집에서의 생활이 마냥 좋았다. 아침마다 갓짠 버펄로 우유를 끓여 먹었는데, 먹어본 음료 중 제일 맛있었다. 카트만두에서 치투완에 가는 7시간 동안 창문 너머 보았던 네팔은 나라 자체가 산이었다. 동남아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15개국 20여 도시를 다녀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발달이 덜 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병원에 가려면 며칠을 환자를 업고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병원에 못 가 죽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오게 된 아이들은 보통이다. 마당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호랑이가 물어가 이곳에 오게 된 아이, 엄마가 낫으로 머리를 찍어 마을 사람들이 구해 데려온 아이, 새엄마가 아빠를 살해하는 것을 목격하고 도망쳐 온 남매, 엄마가 자살하고 아빠는 사망해 온 자매, 강가에 버려진 채 발견된 아기들 등. 하지만 이런 사연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진짜 사랑을 배워가고, 진짜 꿈을 찾아간다.

꿈을 찾아가는 시간

나름대로 반년 간 여러 수업과 공연을 열심히 준비했다. 준비해간 1~5학년 수업 중 가오리연을 만들고 그 위에 꿈을 그려 날리는 수업이 있었다. 만드는 방법이 있었지만, 왠지 더 잘 날 것 같아 모세스라는 아이가 만든 연의 실을 친구들과 좀 다른 위치에 매달아줬다. 연 만들기를 마친 후 다 같이 운동장으로 나가 연을 날렸다. 대부분의 연이 하늘 높이 잘날았는데, 모세스의 연만 빙글빙글 돌다 자꾸 떨어졌다. 실 위치를 제자리로 고쳐 달았지만 그래도 날지않았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에게 모세스는 "디디(언니, 누나) 노 프라블럼, 유알 어 베스트 티처"를 외치며 날지도 않는 연을 들고 30분 동안 열심히 뛰어다녔다.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귀여웠다. 구루카(네팔 군인, 험악한 산도 뛰어다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가 되고 싶다던 모세스의 꿈이 꼭 이뤄지길.

"디디, 마이네임? 마이네임?" 함께한 친구들과 다시만나면 자신의 이름을 물어본다. 밤마다 전체 학생기록부에 있는 사진과 이름을 보며 수십 명씩 이름을 외웠다. 많은 친구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기억하고, 마음속에 담고 싶었다. 매일 저녁 드리는 예배엔 한 학년씩 꿈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다. 까불거리던 아이들도 이 시간만큼은 진지해진다. 앞에 나가 손을 들고 각자 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꿈과 소망의집과 네팔과 세계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한다. "We are the Future of Nepal, We are the hope of Nepal"이라고 외치며 이들은 여기서 꿈을 꾼다. (카스트 제도도 남아있고, 우민정책이 아직도 심한 네팔에선 교육환경이 정말 열악하다. 흙바닥에 책상과 의자 없이 달랑지어진 아무것도 없는 건물이 학교다. 아니 일단 그학교에라도 가려면 몇 시간 동안 산을 타야 한다. 여름엔 더워서, 겨울엔 추워서 건물 내에 있지 못하고, 당연히 전기도 없다. 아이들은 그래도 좋은 건물에서 좋은 교육체계로 공부하는 것 같았다.)

지켜야 할 약속

마지막 날 밤, 모세스가 갑자기 부르더니 나에게 사슴뿔에 줄을 꿰어 만든 목걸이를 주었다. 첫날부터 손목에 감아 옷 속에 넣고 있던 걸 보았는데, 아끼던 물건임이 분명했다. 이걸 받아도 되나 싶었다. 중요한 물건이라고, 가방에 잘 넣어 한국에 가져가라는 말을 하고 모세스는 뒤돌아 갔다. 어떤 의미가 있는 물건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카트만두로 떠나는 날 아침, 정든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디디, 컴 투 네팔 어게인 오케이?" 하며 아덜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순간 망설였다. 이렇게 멀리 또 올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고민도 잠시, 그냥 또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약속을 해버렸다.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한다. 버스에 올라타 문을 닫기까지, 아이들과 헤어지기가 너무 힘들었다. 버스가 출발한 뒤에도 큰길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이들은 한참을 달려서 따라왔다. 달려오던 꼬필라는 전해주지 못한 편지를 창문을 두드려 전해주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길에 손때 묻은 사슴뿔 목걸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다음에 다시 가서 이게 어떤 목걸이였는지 꼭 물어봐야지.

변화의 시작

다녀온 이후 더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에게 주어진것들이 너무 많다. 네팔이 아닌 한국, 건강한 부모님, 좋은 환경,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분명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인가 변해야 한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 찾아오시고 날 사랑하신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증명하신 그분처럼, 네팔 아이들의 삶에 찾아갔던 선교사님 부부처럼, 나도 찾아가 더 사랑하고 싶다. 더 공감하고, 나누고, 함께하고 싶다. 어떻게 구체화할지는 더 고민해야겠지만, 분명한 것은 변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번 경험을 통해 그 고민이 시작되어 기쁘다. 이러한 고민들로 내 남은 20대가 무르익어가길 소망해본다.

다음 필봉계주 주자는 부산경남지역본부 건설사무소 정찬우 주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