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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봉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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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계주

회삿밥 먹은 지 몇 달이나 지났다고,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 사원증을 메는 게 어색하지 않다. 입사 동기들은 이제 거의 친구를 넘어 가족 같고, 서울 본가가 아닌 사택을 집이라고 부른다. 부서에서는 열의도 있고 넉살도 좋은 막내로서 이것저것 배워 가며 쑥쑥 커가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적응을 굉장히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회사가 너무 힘들었다.

[글 성과평가부 권승연 직원]



일도 사람도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갓 입사한 신입이 하기에는 건방진 생각이겠지만, 나는 회사 생활을 정말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도 사람도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일 잘한다는 평을 듣는 주변 선배님들처럼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지 못해 주눅이 들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럴수록 나는 1인분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들고 마음이 답답해졌다. 잘 해보겠다며 발버둥 치느라 소모한 에너지만큼 나는 빠르게 지쳐갔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별 것 아닌 일에도 짜증을 내고 눈물을 흘렸다. 힘들고 서러워 울다 잠이 들면 다음 날 컨디션에 지장이 있었다. 이 악순환을 끊어보려고도 했지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에는 우리 부서가 너무 바빴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푸념을 해 봐도 잠깐 기분이 풀릴 뿐 근본적으로 바뀌는 건 없었다.

크게 잘못한 게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러다 결국 사달이 났다. 지난 2월, 한참 경영실적보고서로 바쁜 시기에 나는 크게 앓았다.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식사는커녕 물 한모금 넘기기도 버거워 약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흘간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결론적으로 한 가지 질문에 부딪혔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 됐지?'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나는 크게 잘못한 게 없었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데도 어떻게든 나를 포장해서 더 좋은 사람,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했다. 그게 나를 옥죄는 멍에가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인 양 꾸며내려다 보니 나는 자신에게 엄격해졌다. 인정받겠다는 오기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까지 잔뜩 짊어져 놓고, 그걸 버거워하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상대방의 말이나 태도 때문에 상처를 받아도 '나한테도 뭔가 문제가 있으니 그랬겠지, 내가 좀 더 잘하면 되겠지'라며 내 탓으로 돌리고 괜찮은 척 꾹꾹 눌러 참았다. 이처럼 나조차 내 편이 아니었으니 배로 지치고 힘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다

마음의 컨디션은 몸보다 더디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꾸준히 상황은 달라지고 있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도움을 청하니,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에 더 충실할 수 있었다. 그러자 혼자서 아등바등 애쓰던 때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대체 나한테 왜 저럴까'라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의 이유를 찾으려 하는 대신, 상대방의 그 행동이 왜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지 나를 먼저 이해하려 했다. 그런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속상한 일 중 일부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였다. 감정 소모가 줄어드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나는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풀린 날씨처럼 내 일상에도 봄이 스며들어 왔다. 일은 더 바빠졌지만, 나는 이전만큼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회사에서 사계절을 보내고 다시 여름이 온다. 작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나는 아직도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겠다고 내가 아닌 모습을 일부러 꾸며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냥 나 자신일 때 가장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지,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게,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괜찮아. 너는 지금 그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다음 필봉계주 주자는 재무처 내부회계개선부 홍대화 직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