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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계주


[글 평택기지본부 계전보전부 이가은 과장]


6개월 동안 100만 원으로 생활할 수 있을까? 2009년, 나는 봉사활동을하기 위해 단돈 100만 원을 가지고 아프리카 케냐의 한 시골마을로 향했다. 케냐에서의 생활에 대해 주변에서 물어볼 때마다 너무 길어 미처 하지 못했던, 그 따뜻하고 행복했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아프리카, 동물의 왕국?

대부분의 사람이 아프리카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동물과 사파리일 것이다. 동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시골에 머물렀던 나는 2주에 한 번씩 마사이마라국립공원으로 갔다. 그곳에 살고 있는 마사이족 의료봉사를 며칠씩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수많은 동물과 마주쳤다. 흔한 가축은 물론, 가젤, 얼룩말, 개코원숭이 등. 특히 개코원숭이는 난폭하다.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먹을 것을 빼앗아 가기도 하는 강도 같은 녀석들이다. 아쉽게도 코끼리나 사자와 같은 맹금류는 실제로 보지 못하고 발자국만 목격했다. 봉사자들은 야외에서 노숙하다 보니 동물들을 피해 다녀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사파리 투어를 하면 많은 야생동물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가장 동물을 잘 볼 수 있는 곳은 용인 ○버랜드다.

협상가를 위한 나라

케냐에서 외국인으로 살려면 협상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의 모든 것이 협상이기 때문이다. 케냐에 가기 전에는 현지 물가가 굉장히 낮은 줄 알았지만 큰 오산이었다. 거의 모든 공산품이 수입이라 매우 비쌌고, 특히 외국인에게는 외국인용 물가가 따로 있다. 기본적으로 2~10배다. 물론 그곳에도 대형마트나 고급레스토랑에서는 좋은 물건과 음식을 정가로 살 수 있지만, 배고픈 외국인이던 나는 별수없는 '네고' 인생이 되었다. 현지인들처럼 매번 시장에서 물건을 샀다. 시장에서 물건값을 협상하는 건 둘째치고 밥을 먹을 때도, 미용실에 가서도, 버스비도, 심지어는 버스 안에서 처음 만났는데 나에게 뻔뻔하게 버스비를 대신 내달라는 사람에게 '왜 돈을 못 내주는지'에 대해서도 설득해야 했다. 이렇듯 6개월간의 혹독한 협 상 트레이닝 결과 나는 협상머신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현재는 평화로운 중고나라에서 간간이 그 기술을 쓰고 있다.

위기탈출 넘버 원

케냐에서는 죽음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유는 바로 질병, 말라리아 그리고 범죄다. 특히 HIV보균자나 에이즈환자가 많다. 내가 머물던 고아원만 해도 64명 중 16명이 HIV보균 아동이었다. 물론 전부 부모로부터의 수직감염이다. 나도 HIV가 정말 두려웠다. 그런데 실제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니 전염의 두려움보다는 매일 약을 열 몇 알씩 삼켜야 하고, 조금만 아파도 앓아눕는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다(실제로 HIV는 단순 생활에서는 전염이 어렵다). 20살이 되면 NGO에서의 약물 지원도 끊긴다. 결국 엄청난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 에이즈 합병증으로 많이 사망한다. HIV보다 더 두려운 것은 질병이었다. 케냐는 위생이 좋지 않아서 설사나 복통이 흔했다. 특히 로컬 화학제품에 대한 검증기준이 없거나 낮아 조심해야 했다. 일례로 말라리아 때문에 싸구려 모기약을 사서 뿌렸는데, 그 자리에 풀이 나지 않아 농약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 좋게 말하면 일거양득이지만 그만큼 몸에는 치명타였다. 또 케냐는 아프리카 중 2번째 경제대국이지만, 그만큼 빈부격차가 크다. 세계 3대 슬럼이 있는 나라로 치안이 좋지 않은 편이다. 내가갔던 2009년은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라 저녁이 되면 돌아다니지 못했다. 케냐에 간다면 개인위생과 보안에 철저해야 한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앞서 케냐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좋았던 이야기도 해보려고 한다. 케냐에서 6개월이나 버틸 수 있던 것은 바로 케냐사람들 때문이다. 아이들이 정말 순수하다. 내가 묵었던 고아원에는 TV도 없고 유튜브도 없었다. 아이들은 보통 밖에서 놀거나 책을 읽는다. 세상의 때가 조금 덜 묻어서 그런지 생각하는 방식이 참 순수하고 착해서 놀란 적이 많다. 또한 케냐사람들은 이방인인 나를 많이 챙겨주고 도와주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 무모해서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적은 돈을 가져갔다. 그래도 잘 지내다 올 수 있었던 건 케냐사람들의 정 때문이었다.

오히려 나쁜 것은 한국인이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한국인이 "흑인들은 냄새난다, 천성이 게으르다"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신보다 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케냐의 물가대비 인건비는 매우 저렴했다. 2009년 기준 10~20만 원이면 가정부를 한 달 고용할 수 있었다. 대다수 한국인은 가정부, 운전기사, 경비원 등을 거느리며 살았다. 하지만 월급이 10만 원이라고 그 사람도 10만 원짜리는 아니다. 케냐에 머무는 동안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지 못하고 이 지면을 빌려 쓰게 되어 부끄럽다.

이 글로 인해 혹여나 케냐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게 됐다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내 기억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인 2009년이고, 시골에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도 케냐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수도 나이로비에만 나가도 훌륭한 도시 풍경과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더 많이 변했을 것이다. 특히 케냐는 관광대국으로 동물이 가득한 마사이마라 국 립공원과 전통의 마사이족, 그리고 영국 윌리엄 왕자가 프러포즈한 디로셰 섬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다.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싶다면 개인적으로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추천한다.

다음 필봉계주 주자는 평택기지본부 계전보전부 주현 직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