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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심리학


추석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전통 명절이다. 농경 사회에서 흔히 관찰되지만, 일부 수렵 채집사회에서도 비슷한 의례가 있다. 친척이 한데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선물을 나누고, 춤과 노래를 즐긴다. 심지어 나라 전체가 며칠 동안 경제적 생산 활동을 잠시 중단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일손을 놓고 즐겁게 지내는 축제의 시간이다.
[글 박한선(신경인류학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박한선(신경인류학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 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등을 썼다.

먹고 마시며: 소비 의례

도대체 추석이 왜 있는 것일까? 국가적인 손해가 막심하다. 전 국민이 며칠 동안 일손을 놓고 즐기기만 한다. 학교에도 안 가고, 직장에도 안 간다. 관공서도 쉬고, 상점도 쉰다. 그리고 오로지 음식을 만들고 먹고 마신다. 물론 부엌에서 일하며 평소보다 더 고생하는 주부도 있지만…. 추석은 먹고 마시고 노는 명절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엄청난 소비가 이루어진다. 서양에서는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구워 먹는 풍습이 있는데, 미국에서만 약 4천만 마리의 칠면조가 식탁에 오른다. 그뿐 아니다. 호박파이와 고구마, 크랜베리 소스, 제철 채소 등으로 정찬을 차려 먹는다. 패스트푸드가 일상화된 미국에서도 이날만은 예외다. 온 가족이 모여 손수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나누고 먹고 즐긴다. 추석도 그렇다. 송편이야말로 추석을 상징하는 음식인데, 사실 여간 만들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떡집에서 그냥 사서 먹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가정에서 '굳이' 송편을 만들어 먹는다. 모양도 투박하고 맛도 그저 그렇지만, 그래도 다 같이 모여 기기괴괴한 송편을 만들며 즐기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토란국은 사실 추석에만 먹는 음식이다. 직접 생선도 굽고, 갈비도 찐다. 한쪽에서는 꼬치에 고기와 버섯을 끼워 산적을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잡채를 만들며 전을 부친다. 부엌이 좁아 거실 전체가 임시 부엌이 된다. 조금 유서 깊은 집안이라면 식혜와 한과도 직접 '생산'한다. 얼마나 많은 음식을 만드는지 종종 남은 음식을 설날까지 먹는다.

이러한 일시적인 과소비 풍습을 흔히 소비 의례라고 한다. 주로 휴일이나 명절에 일어나는 집중적인 소비 경향을 말한다. 물질적 자원뿐 아니라, 용역이나 경험의 소비도 포함한다. 아니 근검절약과 청빈한 삶이 옳건만, 펑펑 낭비하는 소비 의례가 있다고? 우리의 정서와는 도무지 맞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소비 의례는 단지 아무렇게나 쓰기만 하는 낭비의 시간이 아니다.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넘치는 자원을 과시하는 날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우리 조상도 추석만큼은 넉넉함을 자축하며 소비의 기쁨을 누렸다.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나온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눔과 베풂: 교환과 증여 의례

소비 의례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환 의례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가까운 친지나 지인 사이에서 선물을 주고받는다. 시장과 마트에는 추석 선물을 위한 특별 코너가 차려지고, 택배회사는 연중 가장 바쁜 한때를 보낸다. 수많은 선물이 전국을 누비고, 한복을 입은 가족의 손에는 하다못해 참치통조림 세트라도 들려있기 마련이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추수감사절에는 초콜릿이나 와인, 직접 만든 음식, 꽃, 액세서리 등을 나누는 풍습이 있다. 심지어 잘 모르는 사람과도 정을 나눈다. 일종의 집단적 증여 행위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추석에는 국가 수준의 큰 연회가 열리곤 했다.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누구나 참석해 먹고 즐길 수 있었다. 이를 외연(外宴)이라고 한다. 잔치가 끝나면 은전, 즉 돈을 나눠 주기도 했다. 아쉽게도 조선 후기에는 나라의 곳간이 비어 외연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고 하지만. 지금도 그렇다. 보육 시설이나 노인정에는 위문품이 답지하고, 군부대나 소방서 등에 격려품이 전달된다. 서양에서도 추수감사절에는 수많은 자선 행사가 열리고, 지역 사회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와 기부가 이어진다. 추석은 먹고 마시는 소비의 시간이자, 나누고 베푸는 교환과 증여의 시간이다. 심지어 죄를 지은 전과자도 사면한다. 그래서 '설에는 옷을 얻어 입고, 한가위에는 음식을 얻어먹는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가족의 의미: 공동체 의례

추석에는 수많은 사람이 이동한다. 기차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매진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역이나 버스터미널마다 밤새며 표를 기다리는 귀성객이 장사진을 쳤고, 정부에서는 특별 수송 대책을 발표하며 국민이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 이들은 도대체 어디를 가려는 것일까? 고향을 향하고, 집안 어른에게 인사를 올린다. 성묘하느라 선산과 묘지를 찾는다. 그렇게 온 가족이 재회하고 서로의 관계를 확인한다. 같이 모여서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즐긴다. 오랜만에 큰 상이 거실에 펼쳐지고, 침실이 부족해 거실과 서재에 임시로 이부자리가 펼쳐진다. 종종 사촌끼리 모여 한방에서 자며 이런저런 수다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앞서 말한 소비 의례, 교환과 증여의 의례에는 사실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다. 인류학자 빅터 터너에 의하면 소비 의례는 가까운 공동체 구성원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다. 가족 친지가 모여 따뜻한 정을 나누고 싶은 원시적인 욕망이 고통스러운 교통 체증을 견디는 힘이다. 추석에는 가족의 영역이 일시적으로 확장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가 많아진다. 큰아버지도 있고, 작은어머니도 생긴다. 고모와 이모는 일시적인 어머니가 되고, 사촌은 형제자매가 된다. 잘해야 네다섯 명을 넘기 어려운 핵가족 문화에 젖어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아주 신비로운 경험이다. 전통적인 대가족 체계의 복잡하고 긴밀한 네트워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일 년에 잘해야 두 번 있는 기회다.

가족 갈등: 지혜로운 명절을 위해

약 십여 년 전부터 추석이나 설 명절이면 빼놓지 않고 나오는 불평이 있다. 명절 음식 장만의 남녀 분담 문제, 처가와 시댁 중 어디를 먼저 가느냐는 주도권 싸움, 그리고 친척 어른의 사려 깊지 못한 조언에 상처받는 취준생의 이야기 등이다.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많으니 추석은 그냥 자체 폐지하겠다는 사람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지만, 추석이라는 인류 최대의 명절을 폐지해야 할 확고한 이유가 되긴 어렵다. 물론 많은 사람이 모이니 종종 가족 간의 갈등도 불거지고 다툼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갈등과 어려움을 잘 해결할 기회를 가지는 것도 전통 의례의 숨은 의미다. 큰 축제가 벌어지면 응당 어디선가는 주먹다짐이 벌어진다. 거나하게 취해 잔칫상 위에 엎어지는 사람도 있다. 음식을 만들고 나르느라 쉴 틈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축제의 또 다른 한 장면이다. 싸움은 말리고, 엎어진 상은 다시 정돈하고, 일은 서로서로 나누는 지혜로운 소통이 필요하다.

물론 전통 의례를 지킨다고 해서 무조건 예전처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송편을 손으로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벼를 직접 탈곡하고, 빻아야 할 것이다. 직접 야산에 가서 솔잎도 떼어 와야 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적당한 수준에서 간소화해야 한다. 칠면조를 먹는 것은 좋지만, 칠면조를 키울 수는 없는 일이다. 마트에서 사와야 한다. 선물 교환도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럽다. 가까운 친척, 어려운 이웃에게 마음만 전해도 괜찮다. 차례도 그렇다. 말 그대로 차를 올리는 예다. 형식은 간소화하며 마음으로 조상을 기리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음식 장만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즐겁게 참여하고, 조카에게 민감한 조언은 서로 조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간소화되더라도 진정한 의미까지 퇴색되어서는 곤란하다. 수천 년 전부터 시작된 추수 감사의례의 인류학적 의미, 즉 풍요로운 씀씀이를 즐기고, 가족 친지 이웃과 좀 더 넉넉한 인심을 나누며, 소중한 가족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원초적 의미를 살려 나가는 현대인의 지혜가 필요하다.

둥글게 밝은 보름달처럼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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