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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봉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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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계주

추석 전 일요일, 태풍 링링이 한반도를 휩쓸고 간 바로 다음 날 나는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묻히신 묘의 벌초를 하러 갔다. 매년 이맘때 으레 하던 것이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할아버지의 묘부터 시작이다. 묘 주변으로 어지럽게 자라있는 도토리나무를 톱과 낫으로 베고, 예초기가 훑고 간 자리를 다듬어 나갔다. 그렇게 구슬땀을 흘리며 일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얼굴 한 번 뵙지 못한 할아버지의 묘를 정비하고 있는 것이며, 지금 함께 있는 아버지와 동생과 나는 또 어떤 인연으로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자의 연이 아버지와 나의 연, 나와 동생의 연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런 연을 바탕으로 벌초를 했고, 나는 불쌍한 도토리나무를 베었다. 그렇게 나는 도토리나무에게 악연이 되었다.

[글 신성장사업처 수소사업부 김재훈 주임]



어떠한 이유로 만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인연을 맺는다. 먼저 인연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원인을 이루는 근본이라는 뜻의 '인(因)'과, 인연, 연줄을 뜻하는 '연(緣)'이 만나 이루어졌다. 이것을 내 식으로 풀어보면 '어떠한 이유로 만나게 되어 너와 나로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인연이라는 말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국어사전 상 정의를 따를 때 이 세상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인연이 존재한다. K팝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가수 안예은의 <홍연>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세상에 처음 날 때 인연인 사람들은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이어진 채 온다 했죠.' 정말 이런 실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실로 엉켜있을 것이다. 또 나와 도토리나무의 악연이 원인이 되어 나와 다람쥐의 또 다른 인연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 인연은 그 방대함을 넘어 절대 수렴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인연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 개념을 나의 인생에 한정하여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악연을 사랑으로 극복한 부모자식 간의 연

최근에 나는 '태어났기에 불행하고 불행하기에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한 인간의 탄생은 자신의 의지가 절대로 개입할 수 없는 행위다. 출생 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이와 유년기를 거쳐 어른이 된다. 그 후 고군분투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세상의 구조에 직면하여 굶주림과 고독함에 무너지지 않도록 삶을 살아내야 하고,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필연적인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숙명까지 생각해봤을 때 '원치 않은 등장으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아픔'이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해소하기 위한 자기방어적인 위안을 위해 자연스럽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그토록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는 아닐까. 아니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의 반대급부로서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바로 행복은 아닐까. 이런 다소 비관적인 관점에 비추어보면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인연은 필연적으로 악연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좋은 의미의 인연이라고 표현한다. 나 역시 그렇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이렇게 시답잖은 글이라도 쓸 수 있도록 한 가장 위대한 원인은 바로 나의 부모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의 인연을 선연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악연을 사랑으로 극복한 경우에 형성된다. 부모는 자식을 낳고 사랑으로 양육한다. 자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큰 후회를 하지도 않으면서 한 인간의 또 다른 인생을 준비시킨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은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때로는 가슴에 못을 박기도, 누구에게보다 큰 원망을 품기도 하지만 유년 시절 사랑으로 양육한 그 인연은 결국 선연으로 남는다.

의지에 따라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이처럼 필연적인 고통을 안겨준 부모도 긴 시간의 사랑과 상호작용을 통해 선연이 될 수 있음을 비추어 봤을 때, 좋은 인연인 선연은 내 의지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많은 여생에 대한 기대', '나를 이 땅에 있게 하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감사함'을 더하여 내 남은 인생을 선연으로 충실하게 채워가길 다짐한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는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를 통해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을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지금의 선연을 바탕으로 남은 인생이 의미 있는 인연과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피천득《인연》

이선희[그 중에 그대를 만나]

다음 필봉계주 주자는 경영협력처 기업문화부 박성민 주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