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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계주

오늘과 똑같은

[글 강원지역본부 안전환경부 안영진 주임]



오늘은 지루한 날이었다. 어제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엊그제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지난주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그만두자. 일상을 소중이하라는 격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건 직장 책상에 앉아 잘 풀리지 않는 업무를 하다보면 금세 잊힌다. 문자 수신음이 울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니, '부고'라는 꽤나 익숙한 문자였다. 꽤 큰 기업에 다니는 덕분에 하루에 한번쯤은 이렇게 전 직원을 대상으로 부고가 날아오고는 한다. 일면식이 없는 분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신세졌던 분들이 관련되었을까 놓치지 않고 읽는다. - 박영숙님께서 금일 영면에 드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번 부고는 꽤나 특별했다. 내가 아는 사람의 부고였다. "회사에서 온 게 아니네, 이거" 사촌이 보내온 나의 어머니의 부고였다.

반차를 쓰고 차를 운전해 내려가는 길은 꽤나 멀었다. 당신께서 계시던 곳은 전라남도, 나는 서울에서 일하고 있으니 먼 것은 당연했다. 시간은 2시를 조금 넘긴 시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왜일까 평소 같으면 뚫린 도로에서 조금쯤 속도를 높이며 달리겠지만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오늘의 부고는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22살의 여린 나이에 결혼하시어 23살에 나를 낳고, 내가 9살 되던 해 우리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남겨진 것은 찾지 말아달라는 편지 한 장뿐. 어째서 떠났을까, 어린 시절에는 한참 동안 고민했었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물어볼까 했지만 아주 어릴 적에는 화내는 아버지가 무서워 묻지 못하고, 화난 모습이 무섭지 않을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슬퍼하는 모습이 더 무서워 묻지 못했다. 가정불화나 형편의 사정이었을까 생각해 보지만 그 시절의 나날은 정말 평범했다. 심지어 당신께서 떠나시던 전날조차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래 마치 오늘처럼.

아버지께서는 재혼도 생각 안 하시고 그저 혼자서 나를 길러내셨다. 직장에 취업하고 입버릇처럼 아버지께 "효도 할게요"라고 말했지만 내 나이 마흔 둘에 아버지는 효도 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4년 후에, 40년 만에 우연찮게 친모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친모가 살아있고,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재혼해서 살았다고. 슬하에 자식을 하나 두었지만 사고로 자식과 남편을 먼저 보내고 지금은 혼자 살다가 병이 나서 가족관계를 찾다보니 좁은 동네에서 소문이 나서 결국 이 동네까지 이야기가 오더라,라고 내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친구에게 들었다. '그게 뭐야'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분노가 아니었다. 순수한 의문이었다. 고작 그거 때문에 아버지를 떠났나? 7살의 나를 떠났나? 결국 혼자 남아 병들어간다는 결말을 위해서? 그게 그렇게 행복한 결말이 될 수 있다 생각한 걸까?

당신의 소식을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은 오히려 아버지뿐이었다. 당신이 한 선택보다도 슬퍼하시던, 또 화내시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 결국 수년이 지나 슬픈 얼굴의 아버지, 혼자서 날 기르시느라 부르튼 얼굴로 사랑한다 말해주시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당신의 40년의 세월이 글자 한줄 정도로 요약되었지만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에게 어머니는 고작 그 정도였다. 차디차게 식혀져 이슬이 맺혀있는 소주잔을 입으로 기울여 탁 털어 넘기면 같이 탁 털려 나갈 수준의. 하지만 동창회 이후 며칠 뒤 내 조카라는 사람에게서 당신께서 나를 찾으신다며 전화가 왔을 때는 정말 진심으로 화가 났었다. 후안무치에도 정도가 있지! 전화를 걸었던 내 '재혼한 어머니의 남편의 여동생의 자식'- 줄여서 조카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찾아뵌 당신께서는 병에 걸렸다는 사람치고는 안색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조카는 연로한 당신의 앞으로 나를 데려가 "큰어머니 찾으시던 아드님이 오셨어요"라고 나를 소개했고 그때까지 분노와 동시에 나를 알아볼까 기대했던 나에게 당신께선 "이 아저씨는 누구야! 우리 휘성이 데려오라니까!"라며 소리를 질렀다. 꽤나 까랑까랑하고 당찬 목소리였지만, 나를 앞에 두고도 나를 찾는, 어딘지 이지가 부족한 그 모습은 당신께서 치매에 걸려 20대 초반의 기억에 살고 있노라 알려주었던 조카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해 나의 분노도 또 기대도 동시에 앗아갔다.

당황하는 당신을 앞에 두고 한참을 울었다. 알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와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려도 내 어린 시절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슬픈 얼굴의 아버지가 웃는 얼굴을 하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날에 아버지와 단칸방이 유독 넓고 추워 흐른 눈물이 적신 베게가 말라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옆 마을 장이 설 때 마주칠까 걱정은 하지 않았는지, 그날- 대체 왜- 그렇게- 매정하게 사라졌는지, 묻고 싶었던 말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고 내 눈앞에 있는 건 치매에 걸린 나약한 노인네뿐이었다. 그렇게 당신을 만나고 돌아와 쉬는데 조카에게서 온 당신께서 오늘은 편히 잠에 드셨다는 말이 마음에 밟혀 반년에 한번쯤 당신을 찾아뵈었다. 부양인이 있으면 입원할 수 없는 요양원이어서 내 이름 옆 관계란에 '아들'이라는 단어 대신 '지인'이라는 단어를 적어놓고서 들어가 당신을 뵐 때면 처음의 답답한 감정과 분노는 점차 사라져 차츰 연민으로 발전했다. "다음에 올 때는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사올게요" 이제는 더 어려져 "아저씨 사탕 먹을래?" 따위를 이야기하는 당신의 모습에, 내 빈손이 너무나 초라해 그렇게 말했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호실을 확인했다. 절을 두 번 하고 향을 꽂고 변변찮은 자식 놈 하나 없어 빈소에 조카가 상주를 맡고 있었지만 내가 상복을 대신 입을 생각은, 글쎄 솔직히 들지 않았다. "와주셔서 고마워요", "아니 소식 알려줘서 고맙네" 뻑뻑하게 굳어있던 내 입술이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 생각보다 부드럽게 말이 나왔다. "일이 바빠서 내가 오래있을 수가 없어 미안하네. 좀 있다가 올라가 봐야해" 바쁜 일은 없었다.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너무 신경써주실 필요 없어요" 조카가 답했다. 조카가 어린 시절부터 남편과 자식을 여윈 당신께서 많이 돌봐주어 어머니나 다를 바 없다고 가시는 길 잘 보내드릴 테니 걱정 말고 맡겨 달라는 조카를 보면서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멍하니 창가에 앉아서 장례식장에 들어오는 도로를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들어오는 차들을 헤아리며 몇 대를 헤아리다 잊었다 다시 처음부터 헤아리다 또 잊었다. 들어오는 차와 함께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차와 함께 어릴 적 보았던 당신의 웃는 모습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차와 함께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들어왔다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내일은 또 지루한 날이겠구나. 사랑하는 사람,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고 싶은 사람, 사랑을 할 사람 그 중에 한명을 보냈으니 조금 더 지루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일상이니 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제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엊그제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지난주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오늘과 똑같이.

※ 다음호 필봉계주 주자는 강원지역본부 조우진 직원입니다.